UPDATE . 2018-11-13 16:48 (화)
[김형근 칼럼] 서울 성북구청, '인촌로' 없애는 것이 민족정기 살리는 일 아니다
[김형근 칼럼] 서울 성북구청, '인촌로' 없애는 것이 민족정기 살리는 일 아니다
  • 김형근 논설위원 과학칼럼니스트
  • 승인 2018.09.10 09:06
  • 19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형근 논설위원 과학칼럼니스트
김형근 논설위원 과학칼럼니스트

 1988년 12월쯤의 일이다. 일본의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병세가 위독해 곧 사망할 것이라는 외신이 계속 들어왔다. 다른 일간지 국제부에서 근무하던 그때 필자는 그의 죽음을 대비해 미리 부고(訃告) 기사를 준비했다. 근대 세계사를 전쟁의 시대로 만든 장본인이자 일본 국민들로부터는 ‘살아있는 신(現人神)’으로 추앙 받는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은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은 히로히토의 명칭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일본이 사용하는 ‘천황’을 그대로 쓸 것인가, 아니면 대신에 ‘왕’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국 신문사 사주인 발행인들로 구성된 한국신문협회는 천황 대신에 격하시킨 ‘일왕(日王)’으로 통일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89년 1월 7일 히로히토는 사망했다. 국내 언론사는 일제히 ‘일왕’의 죽음 소식을 전했다. 필자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한자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천황’을 굳이 ‘일왕’으로 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 그리고 그것이 과연 일본으로부터 상처받은 우리의 자존을 치유하는 일일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仁村) 김성수(1891~1955)의 이름을 딴 서울 성북구의 도로 이름 “인촌로”를 개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추진되고있다. 이어서 인촌의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도 개명 작업이 진행되고있다. 당연히 친일 잔재를 청산하겠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는 항일독립단체들이 앞장서고있다.

지난 4일 성북구(구청장 이승로)는 보도자료를 통해 성북구 관내 도로명 가운데 “인촌로” 변경을 적극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구청 측은 지난해 4월 김성수에 대한 대법원의 친일행위 인정 판결에 이어 2월 국무회의에서 1962년에 받은 건국 공로훈장 취소에 따른 조치로 친일 적폐 청산에 기여하기로 하였다고 설명했다.

'인촌로'를 없애는 것이 일본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일일까? 그리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일까? 아니다. 역설적으로 그 잔재를 남겨 그것을 후손에게 알려주는 것이 오히려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 인촌로는 적폐로 얼룩진 친일의 대명사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시절인 2010년에 명칭이 붙였다. 길이길이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닌가?

동네 골목대장의 어쭙잖은 용기를 부릴 때가 아니다. 차디찬 이성으로 일본을 바라볼 때다. 반일(反日)을 넘어 극일(克日)이라는 좀 더 세련되고 성숙함을 보여줄 때다. 신임 이승로 구청장은 결코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 칼을 빼 들었다. 자존심이 좀 상하겠지만 이제 그 칼을 다시 칼집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만약 변경을 고집한다면 일본의 국화(國花)라는 이유 때문에 죄 없는 사쿠라 벚나무에 톱을 들이대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 된다”. 그러나 도로의 이름 “인촌로”를 개명해 “고려대로” 만드는 것이 일제를 청산해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은 결코 아니다. 있는 그대로가 훨씬 더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데 교육적이다. 망각(妄覺)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어야 한다.  청산(淸算)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고 해결하는 것이다. 현명한 접근이 필요하다. 이승로 구청장은 편협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이름 바꾼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올드 보이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hgkim54@naver.com


인기기사
섹션별 최신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