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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미가 만난 사람] 人 李木乙
[유연미가 만난 사람] 人 李木乙
  • 유연미 논설위원
  • 승인 2019.09.02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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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목을
작가 이목을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구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李木乙이다. 그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극사실주의 중견작가다. 오늘의 입지와 달리 그가 살아온 발자취는 평범치 않았다. 아니 파란만장했다. 그런 人 李木乙이 살아온 뒤안길, 그 길을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으로 반추한다면, 이는 나만이 고집하는 퍼즐의 한 편린일까? 아니다. 단언컨대 아니다. 그의 인생 오라기의 한 올, 그것을 당겨본 사람이라면 기꺼이 허락 할 것이다. 그러기에 필자가 人 李木乙을 주목하는 이유다.

그렇다. 人 李木乙에게는 삼단계의 인생하늘이 있다. 파란(正), 빠알간(反) 그리고 청명한 새-파란 하늘(合)이다. 보자. 그의 유복한 일상들, 초등학교 6학년에 막을 내린다. 정(正)이 기울고 반(反)이 시작됨이다. 대신 가난이라는 굴레의 서막이 시작된다. 부친의 사업실패가 단초다. 여기에 한 쪽 눈을 실명하는 절망의 순간이 다가온다. 중학교 때의 상황이다. 설상가상이다. 거듭되는 환난의 현실, 그를 자연스럽게 어두운 세상으로 이끈다. 소위 지하세계(?)다. 일탈행위의 시작이다. 밥 먹듯이 사용하는 주먹, 그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일주일씩 굶는 것은 기본. 허구한 날 다리 밑에서 밤을 지새며 주린 배를 버려진 음식쓰레기로 채운다. 급기야 빼앗고, 훔치고, ‘앵벌이’가 된다. 그렇다. 그는 부랑아처럼 살았다. 아니 그는 부랑아였다. 철저하게 일탈 행위로 점철된 그의 청소년기!

하지만, 하지만 李木乙은 여느 부랑아와 달랐다. 두 가지 측면에서다. 먼저 그의 긍정적인 마음을 보자. 그는 늘 이와 같은 가난과 신체적 결함의 큰 시련 뒤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나이에 이럴 수 있나? 있다. 李木乙이기에 가능했다. 나머지 하나는 미래의 꿈에 대한 확고한 의지다. 어릴 적부터의 꿈 화가, 꼭 이루고자 했다. 실명 되었을 때도 그 꿈은 변함이 없었다. 미동조차 없었던 그의 모습, 어쩌면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의 방증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의 일과를 분(分)단위로 계획했던 李木乙, 그는 하루에 한 시간의 수면으로 족했다. 그 외 시간은 돈을 벌기 위해 살뜰하게 사용했다. 야간 중•고등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다. 

고요(靜)-자린고비
고요(靜)-자린고비

한데 이상도 하다. 화가가 되고자 했던 그는 정작 그림 그리기에 대해선 배워 본적도 없다. 그려 본적도 없다. 어렸을 적 친구 대신 크레용과 함께 한 것 외에는 말이다. 단지 그 꿈을 안고 아주 많은 책을 읽었을 뿐이다. 그렇다. 그는 고독을 사랑한 부랑아였다. 프랑스 파리의 부랑아처럼 말이다. 그러기에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킨 부랑아, 바로 그 내면에는 현인(賢人)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맞다. 어린 나이 임에도 현자(賢者)의 기골이 있었다. 이는 그저 혼자 있음을 즐기며 그 시간을 자신의 정신근육을 배양키 위해 활용했다는 의미다. 이것이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다. 성직자의 외로움을 고독(solitude)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이왕지사 여기에 하나 더, 튀는 李木乙의 현인적 기질을 주목해 보자. 20대후반, 다시 한 번 인생의 휘호리 바람을 일으킨다. 순수한 그의 의지로 선택한 일,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산속으로 뛰쳐 들어간다. 한 참 그의 그림이 익어갈 무렵이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둔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8여년의 세월을 보낸다. 짧지 않은 시간, 또다시 하이얀(?) 고독과의 싸움이다. 이때 자연의 생명력에 대한 존엄성에 매료된다. 특히 나무에 대한 애틋함이다. 그 중 소낙비가 내리던 어느 날, 李木乙은 새로운 내면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가 갑자기 그의 가슴으로 투영되는 경험 때문이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이때부터 자신을 木乙이라 불렀다. 나무 위의 새라는 의미다. 일명 ‘솟대’다. 이후 그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격정에 휩싸인다. 극사실적 표현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인생 일대기의 심오한 변화다.

공721
공721

그렇다. 이와 같은 李木乙의 옹골진 현인적 기질, 이것은 가난과 실명이라는 절망의 나락을 그의 정신적 숙성을 위한 조련사로 승화 시켰다. 그 덕에 그는 인생의 합명제(合)를 끌어낸다. 청명한 인생하늘의 신호탄이다. 이것이 바로 ‘진진삼매(塵塵三昧)’의 깨달음이다. 그는 어떤 것이 진진삼매 인지를 낚아챘다. 그다운 모습이다. ‘이슬 속에 달이 반짝임’을 의미하는 진진삼매. 이는 ‘지극히 큰 것이 지극히 작은 것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정신적인 세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큰 것을 작은 것에 둘 수 있을까 세속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절박하고 비근한 질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李木乙, 예인으로서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는 李木乙,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李木乙, 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그림을 그린다는 李木乙, 이렇게 현실과 이상의 꿈을 그림으로 버무린 李木乙, 그는 화가로서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인지했다. 그가 내린 답은 간단 명료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미치도록 갖고 싶어하게 한다는 것. 그러기에 그는 지극정성으로 작품을 품었다. 건강한 작품을 잉태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산고를 통해 그것을 출산했다. 그는 이렇게 했다. 그리고 화가로서 성공했다. 단언한다.

그의 다른 한 눈, 지금 이 순간에도 시력을 잃어 가고 있다. 이 또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人 李木乙. 그의 긍정적인 마음의 끝은 어디인가! 오늘따라 유난히 청명한 하늘, 필자는 그가 그린 ‘도마 위의 고등어’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이 그의 눈임을 알았다. 그의 얼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흔적임을 비로소, 비로소 깨달았다. 이순간 독일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현실적 사유’가 생각나는 이유다.

공915-여정
공915-여정

 


yeanm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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