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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옥 칼럼] 전통과 새로움의 가교
[송동옥 칼럼] 전통과 새로움의 가교
  • 송동옥 서예가 객원편집위원
  • 승인 2019.09.04 14:09
  • 1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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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옥 서예가 객원편집위원
송동옥 서예가 객원편집위원

서예는 ‘먹으로 쓴 글씨’ 이상의 뜻을 가진다. 소통을 전제로 한 펜글씨나 컴퓨터 자판 글씨가 언어의 전달이 주목적인데 비해 서예는 소통의 의미 외에 미적형식을 갖춘 시각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다만 한자문화권의 인문학을 토대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는 여타 시각예술과 다르다. 서예는 필획이 무르익어야 비로소 작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소년 문장은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는 격언도 좋은 서예 작품은 지필묵을 잘 다루는 장인의 솜씨를 넘어서는 정신성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서예는 바로 그 사람이다(書如其人)’라는 말이 회자(膾炙)되는 것도 글씨에 내재한 정신성 혹은 인격성을 중시하는 데서 기인한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예술 형식에 맞추어 서예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외형상 나타난 형태만으로 서예의 미술적 가치를 논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예만큼 전통적이면서 현대미술의 영역에 포함될 만한 우리의 시각매체가 없다.

한 두 세기만 되돌려도 서예는 우리 시각 예술의 노른자위를 차지했다. 서예는 원래 시서화(詩書畵) 전통 속에서 그림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필수 과목이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의 미술대학에 비교되는 궁중화원의 입시 시험에서도 서예를 기초로 한 사군자의 대나무 그림이 산수나 영모 등 다른 그림보다 점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강세황 등도 모두 서예가였다.


최고의 시각예술로 인정받던 서예가 오늘날에 와서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일제 강점과 서구식 교육편제의 영향을 받아 서화(書畵)전통의 통합된 사고는 내몰리고 미술의 하위 개념으로 서예가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한국의 서예는 양적으로 보면 풍성하다 못해 과잉 상태다.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고전을 되새김질만 하는 개념으로서의 서예는 동시대의 예술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서예의 잠재된 에너지가 동시대 예술 특히 현대 미술에 중요한 양분이 될 수 있다.

서예 붓으로 그린 호랑이 그림이 있다. 소재인 동물을 그대로 화폭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군자나 문인화의 사의(寫意)적 형상성을 바탕으로 우리 민화에 나오는 해학의 맛을 오롯이 살리려 노력했다. 간결하고 힘찬 필선을 통해 그려진 동물들의 표정 하나마다 인간과 교감하는 모습을 담았다.

어슬렁거리며 활보하는 호랑이는 귀신을 쫓아내고 돌아온 듬직한 친구 같고, 물속에서 유영 혹은 물 위로 치솟는 물고기는 어지러운 속세를 벗어난 구도자를 연상케 한다. 짝을 이룬 새의 다정함은 사랑의 소중함을, 넓은 세상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거북의 자태는 인간의 영원한 꿈인 무병장수를 염원한다. 시대를 초월해서 전달되는 이러한 메시지들이 서예의 획을 통해서 또 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갈필의 맛과 먹의 강약이 빚어내는 선과 가벼운 터치에서 오는 발랄함은 옛것을 이으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asiatime@asiati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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