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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강주 객원편집위원 한의학박사 |
선물 같은 마지막 가을 운치를 나눠주던 노란 은행잎마저 한 잎도 남김없이 떨어지고, 새벽 기온은 영하권을 넘나들며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풍경도 어느덧 두꺼운 차림새로 바뀌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 채비를 서둘러야 할 때인가 보다. 지난 주말경 점심 차집에 들르니 이웃집 할머니께서 김치를 몇 포기를 가져오셨다며 배추김치 한 접시가 어머니 밥상 위에 맛깔스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김장김치는 언제나 뿜뿜 향기롭고 맛이 있지. 흰 쌀밥 위에 김치를 척척 걸쳐서 맛나게 먹고 있는데, “우리가 언제부터 이 배추김치를 먹기 시작했을까?”. 어머니께서 물으셨다. 나는 이 뜬금없는 질문에 “???”.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김치의 기원’을 즉시 답변할 수는 없었다. “왜애,,, 궁금해요?” “그러네, 갑자기 궁금해지네.”
배추는 고려시대에 몽골족의 원나라 장수가 전해준 것이라는데, 성질이 차고 독성이 있어서 이것을 먹고 병약해지면 고려를 침탈하기가 수월해지겠거니 하는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어서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이것을 그냥 먹지 않고 소금과 고춧가루를 팍팍 쳐서 김치를 담가 먹고 몸이 더 건강해져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우리 민족의 지혜를 강조하던 교수님 말씀이 언뜻 생각나기는 했지만, 너무 오래된 기억이고 정리되지 않은 내용을 말씀드리기에는 이르다 싶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채소의 왕이라 불릴 정도로 대표적인 녹황색 채소인 배추는 다른 채소에 비해 수분이 많고 비타민A와 비타민C, 칼슘이 풍부하며 특히 배추의 비타민C는 열이나 나트륨에 강해서 국을 끓이거나 김치를 담갔을 때도 그대로 유지된다. 시스틴이라는 아미노산 성분은 해독효과와 함께 김치를 담그거나 국물 요리에 썼을 때 속을 편하게 하며 구수한 맛을 내는 효과도 있다. 배추에는 항암, 항균과 살충 작용을 하는 글루코시놀레이트라는 성분과 미네랄과 아연 등이 풍부해 겨울철 면역력 증진에도 도움이 된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배추는 고려에 이르러 널리 식용하게 되었지만, 소금물에 담그거나 천초나 회향 등의 향신료를 첨가해서 매운맛을 낸 백김치 정도가 있었으며, 임진왜란 후 고추가 수입되면서 1700년대 중엽 이후에야 고추를 사용한 김치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800년대 중기 이후에 비로소 청각 등의 해초류 및 고추, 생강, 마늘, 천초, 겨자 등의 향신료와 젓갈 등 해산물이 첨가되는 김치의 형태가 완성되기 시작했다. 김장김치라고 하면 상상되는 속이 꽉 찬 붉은 모습을 띤 맛깔스런 김치의 등장은 결구배추가 등장한 1900년대 이후로서 불과 10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김치에 대한 예상 밖의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나라 김치의 가장 큰 특성은 배추와 붉은 고추와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매운맛 성분인 캡사이신과 비타민 E는 사과의 50배, 밀감의 2배에 이르는 고추의 비타민C 산화를 막아주는 작용을 한다. 겨울 동안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C와 다양한 영양소들을 우리는 이 김치를 통하여 섭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중국의 옛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배추는 독이 조금 있으므로 많이 먹으면 좋지 않다. 많이 먹어서 도가 지나치면 오직 생강만이 그 독성을 풀어줄 수 있다. 하지(夏至) 전에 먹으면 병이 난다. 특히 발에 병이 있는 사람은 금해야 한다. 몸이 허하고 위장이 찬 사람이 많이 먹으면 속이 메스껍고 거품을 토한다. 열이 많고 기가 강건한 사람에게는 잘 어울린다. 생선 비린내를 없애주므로 생선과 가장 잘 어울린다.’ 배추의 냉한 성질과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고추 생강 파 마늘 천초 등 열성의 재료를 배합한 음식이 바로 항암식품이며 완전식품의 대표주자로서 김치가 된 것이다. 가히 음양(陰陽)이 조화된 완전식품이라고 할 만하다. 고춧가루를 쓰지 않은 백김치나 동치미는 성질이 서늘해 열이 많은 소양인(少陽人)에게 알맞고, 매운 양념을 많이 쓴 배추김치는 몸이 차고 속이 냉한 소음인(少陰人)에게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지역마다 집집마다 독특한 김치맛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김장 날은 어느 집안이나 작은 잔칫날이 되곤 한다. 정성껏 담은 김장김치 한두 포기와 함께 이웃과 온정을 나누는 풍습이 세계 어느 나라에 또 있을까. 오래오래 이어가야 할 아름다운 마음이다.
문득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의 서울 생활이 생각난다. 김장철이면 일주일에 두세 번은 되었던 것 같은데, 가까이 사시는 환우분들이 점심 무렵 김장김치를 가지고 오시면 우린 고기를 삶아 병원 직원들과 함께 보쌈 잔치를 하는 날이었다. 화기애애했던 그 날의 추억에 미소가 절로 난다. 건물 1층에는 농축수산물을 취급하는 공판장이 있어서 이런 것쯤은 언제든지 순발력 있게 준비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분들 모습이 하나하나 떠오르는데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