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미 칼럼] 사(四)월이 사(死)월이라 불리는 이유

유연미 논설위원 / 기사승인 : 2018-04-09 17: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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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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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저물었네요. 4.3때 아버지를 잃은 분도쌤(선생님)도 뵙고 … 그래서인지 돌아오는 길, 오름의 중산간에 하얗게 핀 벚꽃의 모습이 오늘은 왠지 소복 입은 여인들처럼 보였어요”

“아, 저도 지난해 방문한 당일새벽 4.3추도현장을 곱씹어 보았지요. 저희 집 창문너머의 만개한 하이얀 목련이 예사롭지 않네요”

이는 지난 3일 저녁 무렵, 지인으로부터 받은 문자와 이에 대한 필자의 회신내용이다. 지인은 제주출생으로 제주에 살고 있다.

그렇다. 필자의 뒤뜰에 흐드러지게 핀 하이얀 목련, 예사롭지 않다. 여기에 비까지 내리고 있다. 이곳의 그 꽃도 마치 소복(素服)차림의 여인과 같은 모습. 물론 필자의 눈에서다. 상단의 큼직한 두어송이 꽃은 목선과 만난다. 그 선은 어깨의 선과 함께 하단의 거대한 치마폭을 이룬다. 여기에 색상은 우유 빛의 순백, 영락없는 웨딩드레스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렇다. 적어도 4월만큼은 아니다. 대신 슬픔의 상징인 소복이 된다. 그것도 흔히 ‘호상’이라 불리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어린 손녀가 입은 그런 상복이 아닌 그 어떤 것. 그렇다. 그 죽음에 억울함이 가득한 검디 검은 한(恨)의 백색 드레스다.

4월, 순백의 대표적인 백목련,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슬픈 그 꽃. 그래서 일까! 이젠 우리의 하이얀 슬픔이 되었다. 바로 제주 4,3사건, 4월 16일의 세월호 사고, 그리고 4.19혁명등의 가슴 아픈 일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4월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것들이다. 물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들, 유족의 입장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 분명 그들에겐 잔인한 4월일게다. 여기에서 공통분모는 희생자들의 억울함에 대한 한.

‘이념’이라는 이자도 모른채 ‘강요된 이념’ 때문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들. 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야만 했던 그 수 많은 양민들. 생사도 모르고 사라진 그 억울한 흔적들. 이도 부족해 ‘‘빨갱이’라는 연좌제로 평생 숨어 살아야만 했던 그 유족들’. 이념갈등이 빗어낸 재앙중의 재앙이다. 이제 그 암흑의 세월이 고희가 되었다. 제주 4.3사건이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속절없이 떠난 수 많은 그 어린 꽃들. 순식간에 피워보지도 못한 그 꽃들은 차디찬 물속으로 떠난다. 그들을 희망이라 부르던 부모들은 ‘단장지애(斷腸之哀)’와 ‘참척(慘慽)’이란 무서운 돌덩이로 가슴을 까맣게 채운다.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4주기다. 세월호 얘기다.

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은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숭고한 죽음의 승리는 오늘의 민주주의 탄생에 초석이 된다. 벌써 이순을 앞두고 있다. 올해 58주년이다. 4.19혁명이다.

푸르른 새싹과 온갖 꽃들이 만개하는 이 아름다운 봄날의 4월, 축제의 향연은 온데간데없다. 현실은 차갑고 잔인하다. 그러기에 4월의 우리 모습은 백목련과 같은 슬픈 소복차림. 이는 안타깝게 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에 대한 우리의 예의다. 그렇다. 최소한의 도리다. 사(四)월이 사(死)월이라 불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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